"무대에선 집 거꾸로 짓는 일도 가능.. 상상력을 키워라" -파이낸셜뉴스

“무대에선 집 거꾸로 짓는 일도 가능.. 상상력을 키워라”

[대한민국 명장열전(26)]

 

30년 무대미술 외길, 무대 디자이너 박동우
1세대 무대미술가의 길.. 시인이자 화가이자 건축가

 

 

국내 최고의 무대디자이너로 손꼽히는 박동우는 “무대 미술가는 시인이자 화가이자 건축가라는 말이 있다”며 “이 세 가지 일을 다 좋아했는데 한꺼번에 하고 있으니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사진=서동일 기자

2시간여 대화가 끝이 나고서 이 단어 외에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리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택했더라도 고단한 일이 생기고 후회가 밀려올 때가 한번쯤은 있다. 그런데 30년 가까이 한 길을 걸으며 고생스럽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창작뮤지컬 ‘명성황후’와 ‘영웅’으로 유명한 무대디자이너 박동우(54) 얘기다. 그는 1990년대 초 공연시장이 급격히 커지면서 무대 디자인이라는 직업을 전문적으로 시작한 1세대다. 무대 디자인료를 무대 장치 제작료로 뭉뚱그리던 시절, 무대 디자인의 저작권을 보장하는 생태계를 처음 만든 것도 그다. 앞서 가는 사람의 길은 험난하기 마련인데 “순탄했다”고 하니, 천직을 만난게 아니고서야. 박동우는 뮤지컬 뿐만 아니라 연극·오페라·무용·국악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무대 디자이너로 꼽힌다. 국내 유수의 무대 디자인상을 최근까지 휩쓸었고 지난해 디자인한 작품만 20편 가까이. 가장 ‘러브콜’을 많이 받는 디자이너라는 의미도 된다.

지난달 23일 박동우 무대디자이너를 서울 서초동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벽면 전체를 덮은 책장에 빈틈없이 채워진 책들이 눈에 띄었다. 소설가나 학자의 방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고개를 돌려 다락방을 올려다보니 그제야 작업실 느낌이 났다. 뒤엉켜있는 무대 모형들이 불쌍하게 쌓여 있었다. “다른 스태프들에게 무대 공간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지 꼭 필요한 건 아니거든요. 컴퓨터 그래픽으로 대체하기도 해요. 무엇보다 제 머리 속에 확실히 있죠. 그래서 무대 모형 수와 그간 작업한 작품 수가 일치하지 않아요.”

공연장에 가면 관객이 가장 먼저 만나는 ‘첫인상’이 무대다. 조명이 켜지고 배우가 등장하기 전 관객이 가장 가깝게 마주하는 공간. 그럼에도 무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무대 디자이너는 어떤 일을 하는지 관심 밖이다. 무대를 ‘공연의 배경’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무대미술은 ‘시각적 극작’이라고 할만큼 공연예술에서 필수적인 요소다.

―무대 디자이너의 역할은 무엇인가.

▲공연의 시각적 환경과 그렇게 표현한 근거, 관객에게 전달하는 방법까지 전부 관장하는 사람이다. 극작에 깊이 관여한다는 얘기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디자이너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나 같은 경우 창작 작품일 경우 대본 완성 전부터 참여한다. 대본까지 관여해 시각적 완성도를 가지도록 계속 영향을 준다. 가령 ‘영웅’에서 만주 벌판을 달리는 기차 위에서 설이가 뛰어내리는 장면은 없던 장면이다. 하이라이트 부분에 갑자기 기차가 등장하면 관객은 기차라는 정보와 사건을 모두 파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해서 제안을 했다. 뉴욕 공연 당시 모든 매체가 ‘영웅’의 그 장면을 언급해서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무대 디자인의 철학 또는 철칙이 있나.

▲’우리는 지금 이 작품을 여기서 왜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작품을 해야 한다. 2014년에 헨릭 입센 ‘사회의 기둥들’의 무대를 디자인했는데 140년 전 노르웨이에 있는 어느 대부호의 저택 거실이라는 배경을 기울어가는 선실로 가져왔다. 각 캐릭터들은 선실이 기울어져 가는지 모른다. 한국사회 자체가 기울어져 가는 선실에 있고 그 안에 우리들은 과연 기울어지고 있다는 걸 알고나 있는가. 그런 해석을 반영한 것이다.

―왜 꼭 동시대적 의미를 가져야 하는가.

▲단순한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를 즐기는 것이 현대 공연예술의 감상이다. 이 작품을 이 시대 관객들에게 어떻게 표현해서 전달할 것인가, 이 작품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가가 화두다. 아무 생각 없이 덴마크의 엘시노어 궁전을 재현하고 외국인처럼 가발을 쓰는 건 ‘햄릿’이 아니라 ‘햄릿 코스프레’다. 무대 디자이너 작업의 절반은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작품에 대한, 우리 사회에 대한 사유에서 이뤄진다.

―이런 무대 미학을 갖게 해준 멘토나 롤모델이 있나.

▲영국 출신의 무대 디자이너 존 내피어다. 대표작이 ‘레미제라블’ ‘캣츠’ ‘미스 사이공’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같은 세계적인 뮤지컬이다. 특히 ‘레미제라블’은 무대와 장면이 어우러져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방법에 대한 교과서 같다. 가령 자베르 경감이 센느강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은 순간 다리가 솟아 오르면서 무대가 회전하고 자베르가 센느강의 소용돌이 속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표현된다. 다리는 불과 20㎝도 안되는 높이였다.

그는 “(연극)’에쿠우스’의 초연 무대도 그가 디자인했다”며 “의도했든 안했든 전 세계 연극인들이 그의 초연 무대를 표절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에쿠우스’의 사각형 무대와 독특한 말 의상은 이 작품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다. 그는 곧 책장에서 ‘에쿠우스’ 희곡을 꺼내더니 무대 설명을 읽어내렸다. “이게 다 연출의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죠? 사실은 존 내피어가 생각한 거예요. 극작가인 피터 셰퍼가 초연의 무대를 대본에 그대로 묘사한 것 뿐이죠. 이게 현대 영미 희곡의 일반적인 관습이었거든요.”

지난해 국내 초연 40주년을 맞은 ‘에쿠우스’의 무대를 의뢰받았지만 “함께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새로운 무대를 제안했거든요. 극단 쪽은 존 내피어 버전을 유지하기 원하더라고요. 40주년 기념 공연이라는 취지와 안맞는다고 생각하셨던 거죠.”

국내에서 그가 멘토로 삼는 무대 디자이너는 고(故) 장종선 선생이다. 그는 “이 분도 직접 만나보지 못했지만 작품과 작품집을 보면서 무대가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극단 산울림의 임영웅 연출과 일생동안 작업하셨는데 너무 젊어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임영웅 연출께서 ‘이제 누구하고 작업하나’ 안타까워하셨다”고 회고했다. 그가 그 당시 임영웅 연출에 대해 잘 아는 이유는 데뷔작이 임영웅 연출의 ‘숲 속의 방'(1987년)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데뷔작을 거장과 함께 하게 됐나.

▲극단 산울림의 인쇄물 디자인을 했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에서 무대 디자인을 공부하던 때였다. 임영웅 선생님께 인쇄물보다 무대 디자인을 더 잘 할 수 있다고 했더니 대뜸 이 작품 한번 해보라고 하셨다.

―왜 초짜인 당신에게 작품을 맡겼다고 생각하나.

▲그러게 말이다. 나도 이유를 모르겠다. 운명이었나. 소극장에서 하는 작은 작품이라 한 번 기회를 주신 게 아닐까 싶다.

‘운명’ 얘기가 나오고부터 자연스럽게 대학부터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는 “나중에 생각해보니 어릴 때부터 뭔지는 몰라도 그런 것(무대 디자이너)을 하고 싶었던 같다”고 했다.

―무대 미술을 하고 싶었던 건 언제인가.

▲대학 때 연극반에 들어갔을 때다. 연극이 좋거나 연기를 하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고교 동창을 따라갔다가 분위기가 좋길래 남게 됐는데 사실은 그게 필연이었던 거다. 초등학교 5학년 학예회 때 선생님이 나에게 큰 역할을 맡겼을 때 ‘싫다. 대신 의상, 소품, 무대를 전부 책임지겠다’고 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문학을 하고 싶었는데 소설가 최인호 선생님이 내 우상이었다. 내가 연세대에 진학해 연극반을 한 이유도 그분을 따라서였다. 나중에 최인호 선생님 소설(‘몽유도원도’)을 원작으로 뮤지컬을 만들게 됐는데 그때 뵙고 우상이라고 말했더니 얼마 안 있어 선생님 연재소설에 박동우라는 인물이 등장했다. 꿈 같았다.

―잘나가는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걱정은 없었나.

▲당시에는 무대 디자이너가 직업이 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환경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내가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은 있었다. 후회한 적도 없다. 나한테 딱 맞는 직업이다.

그는 “‘무대미술가는 시인이자 화가이자 건축가’라는 말이 있다”며 “딱 나를 가리키는 것 같다”고 했다. “텍스트를 우리 시대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할지 생각하려면 문학가적 역할이 필요하죠. 내가 좋아하는 일이 글 쓰고 책 보는 일이었어요. 그림 그리는 일도 무척 좋아했죠. 지금도 시간 날 때마다 제가 좋아하는 자작나무 숲을 그려요.” 그는 책장 앞에 기대있는 유화 한 점을 가리켰다. 어느 화가의 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건축가도 되고 싶었거든요. 물리적인 공간을 구상하는 일, 재밌잖아요. 이 세 가지 다 좋아했던 일인데 한꺼번에 하고 있으니 늘 만족도가 높죠.

그래서일까. 지난 2014년 그는 10년 넘게 오르던 대학 강단에서도 내려왔다. “창작에 전념하고 싶어서죠. 두 가지 일 하니까 둘 다 제대로 못하는 것 같더라고요.”

―무대 디자이너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조언해준다면.

▲무대 미술은 제약이 없다. 집을 거꾸로 짓는 건 현실에서 불가능하지만 무대에선 가능하다. 상상력과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책을 많이 읽는 것도 도움이 된다. ‘영웅’의 기차 장면은 어릴 적 책을 읽어서 받은 선물인 것 같다. 사실은 초등학교 때 독립투사 관련 책을 읽고서 꾼 꿈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이 시대를 분석하고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세계관과 가치관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최근 그는 무대디자이너를 넘어 한 작품의 미학을 총괄하는 예술감독으로도 나서고 있다. 특히 현재 공연 중인 창작뮤지컬 ‘아랑가’는 “판소리와 뮤지컬을 접목해 새로운 장르의 공연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그가 직접 구상해 각종 창작뮤지컬 개발 사업에서 대상을 받으며 세상에 나왔다. 곧 개막하는 서울시극단의 ‘헨리 4세’에서도 무대, 조명, 의상, 소품 등을 총괄하는 미술감독을 맡았다. 극작가로 데뷔할 날도 머지않았다. 그는 “역사적인 인물에 관해 자료조사를 하고 있다. 몇 가지 생각한 소재가 더 있다”고 귀띔했다.

 

당면한 앞으로의 계획은 아주 간단하고 분명했다. “좋은 무대를 잘 만들겠다”는 것. ‘헨리 4세’를 시작으로 국립극단이 제작하는 ‘국물있사옵니다’, 연극 ‘엘리펀트송’, 예술의전당 기획의 ‘세일즈맨의 죽음’, 국립오페라단이 국내 초연하는 오페라 ‘루살카’ 등 줄줄이다. 다만 하반기에는 잠시 내려놓고 무대디자이너 데뷔 30주년이 되는 내년을 준비할 생각이다. “1987년에 이 직업을 시작했으니 내년에 딱 30년이에요. 그동안 했던 일을 정리해보고 싶어요. 전시회를 한다든지 작품집을 낸다든지. 다 내려놓고 올 하반기에 준비해야 하는데 작품이 또 들어오면 어찌 될지 모르겠네요. 하하.”

dalee@fnnews.com 이다해 기자

박동우 무대 디자이너 프로필
△54세 △경북 청송 △대구 심인고 △연세대 경영학과 △홍익대 대학원 산업디자인과 석사 △1987년 연극 ‘숲속의 방’으로 데뷔 △제13회 서울연극제 무대미술상 ‘실비명’ △제22회 동아연극상 무대미술상 ‘고도를 기다리며’ △제1회 한국뮤지컬대상 무대미술상 ‘스타가 될거야’ △제2회 한국뮤지컬대상 무대미술상 ‘명성황후’ △제3회 한국뮤지컬대상 무대미술상 ‘겨울나그네’ △제22회 한국연극 무대예술상 ‘내마’ △제36회 동아연극상 무대미술상 ‘조선제왕신위’ △오늘의젊은예술가상 △2002~2014년 중앙대 연극영화학부 교수 △문화관광부장관 표창 △제29회 서울연극제 무대미술상 ‘덫-햄릿에 대한 명상’ △제16회 이해랑연극상 △제16회 한국뮤지컬대상 무대미술상 ‘영웅’ △제41회 동아연극상 무대미술상 ‘줄리어스 시저’
◇그 밖의 주요작품 △연극-신의 아그네스, 고도를 기다리며, 에쿠우스, 벚꽃 동산, 사회의 기둥글, 겨울이야기, 날 보러와요, 올드위키드송 △뮤지컬-갬블러, 서편제, 보이첵, 신과 함께, 아리랑, 인더하이츠, 아랑가 △오페라-라보엠, 가면무도회, 마술피리,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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