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김중식의 만남]윤호진 ‘명성황후’ 뮤지컬 감독, “문화의 선택과 집중이 창조경제” -머니투데이

[서양화가 김중식의 만남]윤호진 ‘명성황후’ 뮤지컬 감독, “문화의 선택과 집중이 창조경제”

티켓 반값 판매로 시장질서 깨는 ‘문화말살의 날’ 안될 말

 

머니투데이 김중식 화백 더리더 화백 |입력 : 2016.01.29 17:56

 

뮤지컬 ‘명성황후’ 연출자인 윤호진 감독이 정부의 문화정책에 대해 날선비판을 했다. 한국 문화산업의 리더에게서 나온 격앙된 목소리기에 그냥 흘려듣기에는 파장이 너무나도 거세다. 무엇이 그를 분노하게 했을까. 한 달에 한번 ‘문화의 날’이라고 정부가 지정해 놓고 표를 반값에 팔도록 했는데 이게 오히려 시장 질서를 깨트리고 있다는 내용이다. 특히 ‘문화의 날’로 인해 오히려 좋은 작품이 사라지고 있다는 게 윤 감독의 주장이다.

뮤지컬 ‘명성황후’로 한국 뮤지컬을 세계 수준으로 이끈 주인공에게서 나온 얘기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는 특히 “중국은 장예모 감독을 브랜드화시키거나 관광 상품화시켜서 국제적인 경쟁력을 만들어냈다”면서 “우리나라는 누구 하나 잘나면 끄집어 내리기 바쁘다. 그러다보니 우수한 인력이 더 뜻을 펼치지 못하고 사장된다. 창조는 단 한사람이 하는 것이다. 영국의 ‘해리포터’처럼 한사람의 아이디어가 그 나라를 먹여 살린다. 이런 것이 창조경제”라고 창조경제 모델을 제시했다. 윤 감독과의 인터뷰를 통해 미래 한국문화산업을 조명해 봤다.
 

 

[서양화가 김중식의 만남]윤호진 ‘명성황후’ 뮤지컬 감독, “문화의 선택과 집중이 창조경제”
윤호진 ‘명성황후’ 뮤지컬 감독

고향이 충청도 당진으로 알고 있다. 언제까지 고향에서 지냈나

“3살에 피난을 떠나 외할아버지가 계신 충청 당진으로 내려왔다. 당시 외할아버지는 당진의 지주셨고 우리 아버지는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의사셨다. 가난한 집안 자식이 부자 집에 장가를 가신 경우다. 당시 당진은 진보세력이 득세하던 지역이다. 지주의 자식이었던 큰 외삼촌도 이런 영향으로‘지주 타파’에 적극 나서기도 하셨다.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이 붕괴되면서 어머니는 28살의 나이에 과부가돼 홀로 두 남매를 키우셨다. 어머니가 포목점을 하시면서 5일장을 따라다녔기에 초등학교만 4군데 정도 다닌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종교에 심취하면서 한국신학대학에 들어가셨고, 문익환 목사의 제자가 되셨다. 아마도 이맘때쯤 당진을 떠난 것 같다. 당진은 외할아버지가 만든 초등학교와 아버지가 개업했던 건물자리가 아직도 남아 있을 정도로 흔적이 많은 곳이다. 이런 영향 때문에 아마도 내가 뮤지컬 ‘명성황후’를 제작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지금도 당진 얘기만 하면 바로 가고 싶을 정도로 애착이 많다. 예술을 하고 나서는 흔적을 찾아다니느라 당진으로 여행도 많이 다녔다.”

동국대를 졸업한 이후 뉴욕으로 유학 가서 공연학 석사를 받았다. ‘명성황후’는 언제부터 준비했나
“나는 홍익대 정밀기계과를 졸업했다. 동국대학원에 가서는 석사를 받았다. 이후 전공을 바꿔 뉴욕대학에서 공연학 석사로 졸업했다. 난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무척 좋아했다. 동시상영 영화만 보러 다녔을 정도니 거의 영화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당시 극장마다 색깔이 분명했는데 우선 우미관은 사회성 있는 작품만을 상영했으며 경남극장은 서구영화를, 명동극장은 러브스토리만 상영했다. 고등학교 때 연극을 접하고는 관객과 대면하던 연극이 영화보다 더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뮤지컬로 전향한 것은 1982년 정도였던 것 같다. 당시 문화예술진흥원이라는 곳에서 뉴욕으로 해외연수를 보내줬는데 참여하게 됐다. 브로드웨이에서 제작과정들을 공부하면서 참 많이 배웠다. 특히 뮤지컬 ‘캐츠’를 보고 ‘우리나라도 이런 것을 준비하지 않으면 큰일나겠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우리도 준비해야겠다. 이러다가 우리 시장을 외국에 빼앗기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1995년 ‘명성황후’ 뮤지컬을 만들었다. 2년 후인 1997년 브로드웨이에 가서 첫 공연을 했다. 10년 만에 내 작품을 브로드웨이에 가져간 것이다. 감개무량했다. 이후 해외공연도 많이 했다. 캐나다에서도 LA에서도 공연했고 영국에서는 영어버전으로 공연하기도 했다. 당시 뮤지컬을 많이 했던 나라는 영국과 미국밖에 없었다. 한국이란 변방 국가에서 이런 작품을 가지고 왔다는 게 당시로서는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어려움도 많았다.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돈보다는 신념이 앞서는구나. 신념이 확실하면 모든 게 다 이뤄지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학생들에게도 “너희가 좋아하는 일에 미쳐라. 아무리 힘든 일도 해결된다”고 조언했다. 미치면 엄청난 에너지가 창출된다. 내가 미쳤기 때문에 한국 뮤지컬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간 것이다. 자부심을 느낀다. 한국인들은 가무에 능한 민족이다. ‘비보이’가 그렇고 ‘K-POP’도 그렇다. 세계 정상을 차지하고 있지 않나. 노래와 춤을 잘하는 민족은 그리 많지 않다.”

‘명성황후’ 첫 공연은 언제였으며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1995년도에 시작했으니까 ‘명성황후’는 벌써 20년이 된 뮤지컬이다. 난 앞으로 10년 후인 30주년에는 초창기에 같이 만들었던 운영위원들이 다 같이 무대에 올라와 인사드리기로 약속했다. 가업 때문에 먹고 사는 문제로 함께하지 못했던 분들과의 약속이다. 이 분들이 지금까지 운영위원으로 남아준 것만 해도 감사하다. 고마움의 표시다.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10년 후 휠체어를 타고 무대에 올라오든 지팡이를 짚고 나오든 살아있는 모든 운영위원들이 무대 인사를 할 것이다. 40주년에는 확률이 없지만 30주년에는 가능하다고 본다.”

서울대 이만익 교수는 ‘명성황후’ 포스터를 통해 더욱 이름이 알려졌다. 혹시 에피소드가 있다면…
“이만익 교수에게 ‘명성황후’ 포스터를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 처음에는 거절하셨다. 이유는 일제치하에서 창시개명을 하셨는데 공교롭게도 이름이 ‘미유라’였다는 것이다. ‘미유라’는 명성황후 시해 주범 낭인이다. 고사하다가 여러 번 설득 끝에 마지못해 해주셨다. 연배는 나보다 10살 정도 많으시지만 연극을 좋아하셔서 자주 만났다. 연극을 좋아하는 주변 사람들과도 함께 얘기를 많이 나눴다. 종로2가에 가면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호프집이 있다. 이곳에서 주로 만났다. 지금도 자주 연락하고 지낸다.”

‘명성황후’를 통해 수많은 배우가 배출됐다. 특별히 생각나는 배우는 누구인가
“정말 수많은 배우들이 ‘명성황후’를 거쳐갔다. 그중에 17년 동안 주인공을 한 이태원 씨가 가장 많이 생각난다. 이태원 씨는 1995년 브로드웨이뮤지컬 ‘왕과 나’에서 첫 번째 왕비 역으로 출연 중이었다. 뉴욕에서 내 기사를 읽었는지 자기도 캐스팅에 참여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난 곧바로 ‘왕과 나’를 관람하고 거기서 캐스팅을 바로 했다. 이태원 씨가 주인공하기까지 윤석화씨가 주인공으로 있었다. 두 분 다 내게는 소중한 인연이다.”

아드님이 많은 일을 도와주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드님에 대해 한 말씀을 해준다면
“아들이 하는 일은 내가 하는 일과 많이 다르다. 내 뒤를 이어주기를 기대했지만 내 재능을 이어받은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새로운 후계자가 나와서 100년이 가든 200년이 가든 ‘명성황후’를 계속 이어줬으면 좋겠다. 우리 아들은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사회적 기업이다. 아들과 함께하는 친구들은 사고가 깨어있다. 그들은 정치구조 까지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산골 오지에 가서 살면서 먹거리도 만들고 그곳에서 자리 잡고 군수까지 되는 것을 봤다. 또 국회의원도 배출하고 사회를 개혁하겠다고 나선다. 난 이들에게 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난 이런 친구들이 우리 대한민국 요소요소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혼이 맑은 아이들이다. 지원해주고 싶다.”

‘명성황후’는 해외공연을 많이 했다. 첫 공연을 언제 어디서 했으며 기억에 남는 공연장소는 어디인가
“1997년에 뉴욕에서 처음으로 공연했다. 준비하는데 너무 힘들었다. 돈을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난 출연진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농담반 진담반 “돈 받으면서 독립운동 했다는 얘기 들어봤냐?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게 독립운동이다. 출연료는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떠나라”고 얘기했다. 3명이 떠났다. 당장 돈을 벌지 못하면 생계가 힘든 분들이기에 이해했다. 뉴욕에 가려고 땀이 소금이 될 정도로 연습했다. 출연진들은 이러다 못 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많이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도 걱정했지만 “뗏목을 타고 가서라도 공연하겠다”고 안심시켰다. 정말 뉴욕에 가기 전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천일야화’ 같은 얘기들이다. 나중에 이 얘기는 꼭 책으로 쓰고 싶다. 뉴욕 공연이 확정되고 100명 정도가 뉴욕으로 떠났다. 뉴욕에서 기적적으로 막이 올라갔다. 한 타임이 3시간인데 돈이 없어서 연습도 못하고 곧바로 공연에 들어갔다. 출연진들이 얼마나 불안했겠나. 난 “서울에서 공연해 봤으니 당황하지 말고 잘 해내자”라고 부추겼다. 정말 기적같이 해냈다. 2800명 객석이 용수철처럼 일어나서 박수를 쳤는데 순간 울음이 터져 무릎을 꿇고 펑펑 울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게 되는구나.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는데 되는구나. 한번 사람이 해낸다 했을 때 초인적인 에너지가 나오는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그 이후 장애물이 있어도 장애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딴 사람들이 보면 미친놈이라고 했을 것이다. 역사는 광인이 만들어내는 게 역사다. 많은 후배들에게 얘기해 주고 싶다. “너희들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너희들이 해낸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고 너 자신을 믿으면 된다”라고.”

후배들에게 바라는 점이나 조언할 것이 있다면 말씀을 해달라
“우리 민족에게는 DNA가 있다. ‘신명’이라는 DNA다. 종교적으로 보면 ‘샤머니즘’ 정도 표현할 수 있겠다. ‘신명’이 나면 힘든 줄 모른다. 그런 것들이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전쟁으로 황폐화돼 있던 나라가 세계 중심에 우뚝 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류 드라마나 K-POP도 금방 지나갈 것이라고 얘기들 하지만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물론 아직 열약한 환경에서 후배들은 졸업하면 먹고사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이들에게 ‘장인’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장인’이라는 것은 자기 일에 긍지와 신념을 가지고 버리지 않고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다. 한 분야에서 우수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장인’이 많은 사회일수록 훌륭한 사회다. 후배들이 어려운 공연계 현실 속에서도 자존심을 유지하고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임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하다보면 언젠가는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성인자’가 아닌 ‘열성인자’인 사람은 도태된다. 또 하나는 세계로 나가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산업으로 만들려면 엄청난 시간과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이렇게 노력해도 산업화되기가 어렵다. 이런 가운데 거대한 중국시장에서 우리가 가진 재능과 예능을 창출하면 엄청난 시장이 될 수 있다. 나도 중국에서 작업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싶어서다. 아울러 인도도 바라봐야 한다. 인도의 모든 영화는 뮤지컬처럼 만들어져 있다. 인도 친구들은 우리처럼 문화를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아직 부족하다. 불평불만보다 빨리 중국, 인도 등 해외로 나가야 한다.”

열약한 연극계를 대변해 정치인들에게 바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우리가 가장 못하는 게 선택과 집중이다. 중국은 장예모 감독을 브랜드화 시키거나 관광 상품화시켜서 국제적인 경쟁력을 만들어냈다. 우리나라는 누구 하나 잘나면 끄집어 내리기 바쁘다. 그러다보니 우수한 인력들이 더 뜻을 펼치지 못하고 사장된다. 창조는 단 한사람이 하는 것이다. 영국의 ‘해리포터’처럼 한사람의 아이디어가 그 나라를 먹여 살린다. 이런 것이 창조경제다. 지금 정치인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선택과 집중을 해줬으면 좋겠다. 또한 하나의 정책에 100% 찬성이란 것은 없다. 선거도 과반만 넘으면 당선되는 것처럼 반대가 있더라도 밀어붙여야 한다. 지금 국제적인 사회구조는 경쟁이 더 치열해지는데 우리는 타이밍을 놓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한 달에 한 번 ‘문화의 날’이라고 정부가 정해놨는데 표를 반값에 팔고 있어서 오히려 시장 질서를 깨트리고 있다. 어렵게 공연을 준비하시는 분들을 위해 돈을 내고서라도 봐줘야 한다. 공짜표는 없다. ‘문화의 날’로 인해 오히려 좋은 작품들이 나오지 않고 있다. ‘문화의 날’이 ‘문화말살의 날’이나 마찬가지다. 제대로 된 정책을 펼쳐줬으면 좋겠다.”
 

 

[서양화가 김중식의 만남]윤호진 ‘명성황후’ 뮤지컬 감독, “문화의 선택과 집중이 창조경제”
▲윤호진 ‘명성황후’ 뮤지컬 감독

올해는 광복 70주년이다. ‘명성황후’와 연관해 광복 70주년의 의미는?

“난 늘 작품을 통해서 역사의 교훈을 알리고 싶었다. 가장 중요하면서도 못 지키고 있지만 마음만은 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명성황후’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백성이여! 일어나라!”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죽은 영혼들이 부활한다. 이 장면도 “나라부터 생각하라”라는 나의 메시지다. 나라가 없으면 우리도 민족도 존재하지 않는다. 격변기에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려고 했다는 것은 그만큼 명성황후가 정치적인 파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명성황후 평가에 대해 다양한 시각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노선을 바꿔가며 나라를 살리기에 고민했던 분이다. ‘명성황후’가 주는 교훈을 잊지 말자는 얘기다. 첫 작품에 대해 “왜 하필 너희들 소재로 했느냐”라고 물어봤을 때 난 이렇게 대답했다. “무력으로 침공 받으면 무력으로 방어할 수 있는데 문화는 들어오면 막을 길이 없다.” 자기 나라의 문화가 소멸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 중국이 인터넷을 막는다고 하지만 막을 수 없다. 우리 것을 해야 우리가 산다. 난 우리 문화를 지킨 최후의 보류가 ‘명성황후’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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